성악설 한 토막

짧은 글 2018. 5. 11. 01:53

인간은 사악하다. 그게 우리의 본질이고, 본성이며, 생물로서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는 자유가 실체화한 것이다.


어린 우리들은 죄책감 없이 개미를 짓밟았고, 잠자리 날개를 뜯어냈으며, 메뚜기 뒷다리를 떼어냈다. 한 점의 티도 없는 해맑은 웃음을 만면에 띠면서. 자라나며 교육을 받은 이후에야 생명이 소중하고 비가역적임을 깨달았고, 눈에 보일까말까한 작은 벌레를 죽이는 일마저도 꺼림칙하게 되었다. 고양이는 먹지도 않을 작은 동물을 괴롭히다가 죽인다. '온순한' 초식동물들은 너무 가까이 온 낯선 동물을 공격해 죽이기까지 한다. 우리의 근간을 이루는 악함은 이들처럼 사냥하는 육식동물인 인간에게 필요했던 본성의 반영일 수도 있고, 생존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생물의 근원적 본능일지도 모른다.


후천적으로 선함을 배우는 것은 그저 인간 종이 혼자서는 살 수 없도록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잔혹함과 난폭함을 다스리지 못하면 무리가 와해되고 뿔뿔이 흩어진 인간은 금세 죽음을 맞이할 것이므로. 늑대도, 코끼리도, 고래도, 무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에 필수적인 사항들에 대한 후천적 교육을 한다. 어느 태평양 범고래 무리와 대서양 범고래 무리가 처음 만났다면 그들은 잘 소통할 수 없다. 언어가 다르니까. 인류도 다를 바 없다. 인류는 모두 무리지어 살았지만 그 무리들의 도덕은 판이했다. 어떤 곳에서는 유일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선이고, 어디에서는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이 선이며, 심장을 바치는 것,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 쓰러진 용사나 위인의 육신을 섭취하는 것, 이성의 예리함으로 자연을 파헤치는 것이 선인 곳들이 모두 있었다.


이 본연의 악함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은 선하므로 세상 어딘가에 천국을 세울 수 있다고 유혹하는 자들은 여태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비극을 만들어내 왔다.


이런 이들은 대체로 인간 내면의 악마를 쉽게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혹은 그런 악마는 없다고 믿는) 오만하고 순진한 바보이거나, 모두에게서 총을 빼앗고 자기 혼자만 총을 가져 마음대로 남의 자유를 유린하려는 악당일 뿐이다.


그런 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활개칠 수 있는 이유는 물론 그 원동력이 되는 지지자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질적인 사악함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들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본능적 광포함을 제어하지 못하는 자일수록 자신이 선하다고 더 믿고 싶어한다. 결핍된 것에 대한 동경이다. 충분히 스스로를 성찰할 능력을 가진 자는 결코 자신이 선하다고 스스로 느끼지도, 선전하지도 않는다.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변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 흘렀다. 인류 문명이 등장한 뒤부터 현재까지 흐른 수만 년의 시간은 진화학적 선택이 일어나기에는 끔찍이도 짧다. 그나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선한 자가 조금이라도 더 잘 번식하거나 더 잘 생존하게 만드는 선택압조차 딱히 없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그러니 천국을 광고하는 사기꾼이 만들어낼 비극의 편수는 앞으로도 셀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언제나 우리가 악한 존재임을, 그러니까 자유로운 생물임을 자각하고 이성의 칼날로 달콤한 선전들을 재단하며 산다면 내가 그 비극의 주인공이 될 확률은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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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칠면조

짧은 글 2018. 5. 1. 11:03

매일 모이를 주는 사람도 다음 날 언제든 모이 대신 도살용 칼을 들고 올 수 있다.

매일 발톱을 세우고 덤벼들던 부엉이를 다음 날 믿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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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일치

짧은 글 2018. 4. 29. 14:54

만장일치는 인류의 적이다. 충분한 논의를 거쳐서 빚어진 결론이라 해도 그렇다. 가장 올바르고, 가장 정의롭고,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득이 되고, 가장 적은 목숨을 희생할 수 있고, 등등, 그 어떤 미사여구가 붙은 결의라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동의했다는 그 자체가, 그 안건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허한다. 이런 결정은 대부분의 경우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전혀 부작용이 없는 안건이었다면 보통의 다수결이었더라도 상관 없었을 것이지만, 만일 치명적 부작용이 파생될 안건이었다면 대개 중지하기에 너무 늦었을 때에 그 부작용이 효력을 발휘한다.


안건 자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반대가 없어야 의사결정이 된다는 제도나 관습 자체가 자유로운 반대를 제한한다.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함이라는 변명이 따라붙겠지만, 알량한 허울일 뿐이다. 이런 사회는 나아가서는 소수파를 소수파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탄압하기 마련이다.


아주 옳아 보이는 결의안을 꼼꼼히 읽어 보고 만장일치를 만들기 위해 동의한 사람들보다, 그 결의안은 잘 모르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를 던진 반동분자가 결과적으로는 좀더 옳은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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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령과자

Thermodynamic equilibrium

짧은 글 2018. 4. 28. 18:57

평화란 전쟁의 반의어가 아니다. 좋든싫든 오게 될 궁극의 종착지이며, 열적 평형과 같은 상태이다.


어떤 길을 거치든 결국 평화는 온다. 영원한 전쟁은 없으며 모든 전쟁의 결과는 평화다. 승전의 결과도 평화이며, 패전의 결과도 평화고, 정복당함의 결과도 평화고, 죽음의 결과도, 행성이 파괴된 결과도, 우주 전체가 열적 평형에 이르러도 평화는 온다.


중요한 것은 그에 다다르는 길 그 자체이다. 평화라는 것 자체를 궁극의 목표라고 선전하는 것은, 결국 가용한 모든 에너지가 언젠가는 쓸 수 없는 약간의 분자 운동에너지가 되리라고 선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운 16주를 넘겨도, 주데텐란트를 떼주어도, 항복을 해도 끝끝내 우주는 열죽음에 다다를 것이므로. 그러나 그 도중에 밟아야 할 길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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